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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시와 수필 한 잔

산업혁명의 그림자 뒤, 사회주의 탄생의 배경 (악마의 원흉,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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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업혁명 이후 많은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로 유입되면서 임금 노동자들로 급속히 변해 갔다. 도시의 인구는 급증했다. 하지만 도시 노동자들의 생활은 비참 그 자체였다.

 더 비참한 것은 직업조차 구하지 못한 대다수의 쫓겨난 농민들이었다. 그들은 악명 높은 엔클로저 운동으로 인하여 하루 아침에 농토를 잃고 거리를 헤매는 빈민이 되었다.

 엔클로저 운도이란 양모 가격이 치솟자 지주들이 경작지를 양을 기르는 목초지로 만든 운동이다.

 중세의 빈민 구제는 교회와 수도원 등 종교 단체나 장원, 길드 등에서 주로 담당하였다. 그러나 16세기 엔클로저 법과 물가가 폭등의 영향으로 농민들이 떼거지가 되어 부랑자가 늘어나자 교회도 이들을 수용할 수 없었다.

 또 성공회의 출현으로 그간 부랑자들을 돌보던 수도원이 해산되었기 때문에 이들이 갈 곳이 없어지자 모이면 떼강도로 변했다.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 지나가는 마을은 초토화되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영국 왕까지 나섰다. 그리하여 교구가 구빈사업을 책임지게 되었다. 정부의 지원을 받은 종교단체들이 이들을 수용하는 '구빈원'을 곳곳에 세웠다. 그리고 직업이 없는 빈민 뿐 아니라 노인과 병자들을 받아들여 건강한 사람에겐 일거리를 알선해줬다.

 제도적으로 구빈세가 과해지고 구빈위원회도 설치되었다. 이들 제도가 엘리자베스 여왕 시절인 1601년 구빈법(빈민구제법)으로 통합되었다.

 그러나 문제점도 많았다. 부랑자들은 심하게 단속해 적발하면 귀를 잘랐다. 다시 적발되면 죽었다. 부랑을 금지하는 대신, 어떻게든 직업을 찾아서 일하라고 강제했다. 그러다 보디 노동계급 곧 노동자와 부녀자 그리고 어린 아이들은 마치 노예처럼 취급당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산업혁명 당시에는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를 보호하는 사회적 장치가 없었다. 산업혁명 직후 노동자들의 삶은 비참했다. 공장은 조명이나 환기 장치가 충분치 않았다. 위생이나 안전이 무시되었다.

 작업 중에 일어나는 사고는 노동자 본인의 부주의로 간주되어 당장 쫓겨나기 일쑤였다. 공장에서 일하다 다친 노동자가 해고 되는 것은 "당연한 일"로 여겨졌다.

 효용이 없는 상품에 가격을 지불할 수 없다는 논리다.그래서 노동자들이 부상을 입어도 이를 숨기고 일을 했다.

 공장에서 쫓겨나면 밖에는 굶주림이 있다는 공포가 노동자를 한낱 상품으로 만들었다. 노동자들은 열악한 환경, 장시간 노동, 생계유지가 어려울 정도의 저임금에 시달렸다. 이러한 환경에서 보통 남자 근로자들은 하루 16 ~ 18시간, 여자들(임산부도 포함)은 14 ~ 15시간, 아동들 조차 12시간 정도 일을 했다.

 도시에 슬럼가가 생겼다. 하루 16시간의 노동을 강요당하는 노동자의 생활은 비참하여 술에 빠져 지내는 등의 사회 문제가 심각했다. 가장 비참한 것은 어린이 노동자였다.

 어린 아이들도 생활전선에 내몰려 자본가의 착취대상이 되었다. 고된 탄광 작업에 싼 임금의 어린이들이 대거 투입되었다. 고된 탄광 작업에 싼 임금의 어린이들이 대거 투입되었다. 광산촌에서 많은 어린이들이 중노동과 폐결핵으로 일찍 죽었다. 도시에서도 가난한 여성들과 어린이들이 싼 임금을 받으면 매일 장시간 일을 했는데 시끄럽고 냄새나며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단순 작업을 반복했다.

 이러한 오랜 노동시간으로 인해 대부분의 성장기의 아동들은 척추나 무릎 등이 휘어졌다. 10살미만의 아이들도 일을 했으며 밤새도록 일하기도 했다. 심지어 겨우 걸을 수 있는 4살 배기 어린 것들이 머리가 멍해지고 눈이 충혈되고 약한 애들은 허리가 굽어 기형아가 될 정도로 그 작은 손가락으로 소모기(*양털의 긴 섬유만 골라 가지런하게 다듬는 기계)에 철사를 끼워 넣는 단순 작업을 여러시간 계속했다. 게다가 걸핏하면 폭행에 시달리는 것도 문제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문제는 어린이들이 교육을 받지 못하는 것이었다.

 1800년대 들어 영국에서 도시 인구의 비율은 급속도로 증가했다. 1801년 26%에서 1850년 45%로 증가했고 1891년에는 68%에 이르렀다. 열국 도시 인구는 19세기 동안에 15배나 늘었다. 결국 도시 슬럼화로 골치를 앓았고 많은 배설물이 강을 오염시키고 공장 폐수가 흘러들어 급격하게 환경이 오염되었다. 그런 가운데 콜레가가 유행했다.

 1832년에 런던에서 5300명이 죽었고 파리에서는 1만 8천명이 목숨을 잃었다. 1840년 공장지대 노동자 자녀의 60%가 전염병 때문에 5세 이전에 사망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당시 공장지대 근로자의 평균 수명이 스무 살이 안 되었다. 특히, 노동자 어린이 평균 수명은 17세였다. 그리고 바로 공장 근처에 자리 잡은 당시의 도시는 위생적으로 최악이었다.

이러한 환경에 울분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사회 원리에 의문을 품었다. 그리고 새로운 사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들은 비참한 노동자들을 구제하고 싶어했다. 인간을 상품으로 보는 자유경쟁에 규제를 가해 인간이 최소한의 인권을 보장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생산시설을 공유하고 평등한 사회를 규현하는 것이 첩경이라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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