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레미 리프킨의 <노동의 종말>에 대한 분석을 중심으로
출처 : 김희진
르네상스 시대의 지식인 토마스 모어는 그의 저서 『유토피아』를 통해 이상 세계를 묘사한 바 있다. 그가 말하는 유토피아의 사전적 정의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나라’를 뜻하는 것으로, 즉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나라, 이른바 지상 낙원이라 할 수 있는 세계였다. 그의 구상에 따르면 유토피아에는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따로 없으며, 또한 부자와 빈자의 구분이 없고, 시민들은 하루 여섯 시간의 의무 노동 시간만 준수하면 나머지 시간을 여가 시간으로 향유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설명에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생략되어 있다. 바로 노예제도이다. 유토피아에는 노예제도가 존재했으며, 또한 노예들은 사람들이 기피하는 노동을 수행해야 했다. 다시 말해 평범한 유토피아 시민들이 하루 여섯 시간의 노동만으로도 정상적인 삶을 향유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남은 노동을 대신해주는 노예 덕분이었다. 따라서 유토피아는 착취의 구조를 은밀하게 함축하고 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인간의 노동을 노예가 아닌 로봇이 대체한다면 그것은 착취가 없는 진정한 유토피아라 불릴 수 있을까? 이에 대해 과감히 그 또한 디스토피아일 것이라 답한 지식인이 있다. 제레미 리프킨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 『노동의 종말』을 통해 기술 혁신에 따른 노동의 미래를 비판적으로 예언하였다.
20세기 초 미국 남부는 흑인 노동력을 바탕으로 농업이 발달해 있었다. 당시 흑인들은 비록 신분상으로는 노예가 아니었지만,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백인 농장주들이 시키는 일을 마다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흑인들의 주된 업무 중 하나는 목화를 추수하는 일이었다. 사실 목화를 재배하는 일은 육체적으로 몹시 고된 일이었지만 흑인 노동자들은 감히 거부할 힘이 없었고, 따라서 백인 농장주들은 저렴한 흑인 노동력을 바탕으로 목화 사업을 확장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별안간 기계 하나가 발명되며 미국 남부지역에 큰 파란이 일었다. 기계의 정체는 이른바 ‘목화 추수 기계’로서, 한 시간에 무려 천 파운드의 목화를 추수하는 성능을 보였다. 이는 흑인 노동자 50명 분에 달하여 백인 농장주들로 하여금 더 이상 흑인 노동자를 고용할 필요가 없도록 했다. 이윽고 농장에서 쫓겨난 흑인들은 새로운 꿈을 안고 북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농업이 발달한 남부와는 달리 제조업 중심의 북부에서는 일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희망을 가졌던 것이다. 하지만 북부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1950년대 중반부터 조금씩 자동화로 물들기 시작한 미국 제조업은 1953년부터 1962년까지 무려 160만여 명의 노동자들이 실직할 만큼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즉 남부와 북부 모두 기술 혁신과 더불어 대규모 실업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두고 제레미 리프킨은 기술 개발 이면에 존재하는 보다 본질적인 원인을 지적한다. 바로 효율만능주의이다. 이는 쉽게 말해 노동의 효율을 최우선으로 중시하는 기업 문화를 뜻한다. 그러한 기업 문화에 기여한 대표적인 인물은 프레드릭 테일러이다. 그의 저서 『과학적 관리법』은 기업가들로 하여금 노동자의 업무 성과를 손쉽게 계산할 수 있는 과학적 표준을 제시한다. 그로 인해 기업가들은 노동자들의 업무 효율을 손쉽게 평가할 수 있게 되었으며, 효율이 낮은 노동자는 개선되거나 혹은 해고되어야 할 존재로 파악되기 시작했다. 즉 테일러의 이론을 통해 ‘노동은 효율적이어야 한다’라는 명제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인간보다 뛰어난 성능을 가진 기계가 등장했을 때 수많은 노동자들이 해고되는 현상은 효율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매우 상식적인 일일지도 모른다.
프랑스의 지식인 자크 아탈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계가 새로운 프롤레타리아이다. 노동 계급에게는 해고 통지서가 발부되고 있다.” 다시 말해 기계는 기존의 노동 계급을 무너뜨릴 만큼 강력한 존재로 상했다. 그렇다면 과연 기계가 노동하는 시대에는 어떤 부작용들이 발생할 수 있을까? 리프킨이 우려한 첫번째 부작용은 노동자 대체 현상이다. 말 그대로 노동자들이 기계에게 일자리를 뺏길 거라는 설명이다. 리프킨이 제시한 통계를 살펴보면 1929년 10월 채 100만명도 되지 않았던 미국의 실업자는 불과 4년 후 1500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1993년 벤츠(Mercedes-Benz)는 자동차 생산 방식을 혁신함으로써 약 1년 내로 만사천개의 일자리를 감축할 것이라 밝혔다. 그 밖에 제조업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로 대규모 실업이 이어진 바 있다. 이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실업자들을 다른 직군에서 흡수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실상 통계를 살펴보면 재취업에 성공한 노동자의 수가 현저히 적을 뿐더러 재취업에 성공한다 할지라도 대폭 삭감된 임금으로 계약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어서 두번째 부작용은 빈익빈부익부의 심화이다. 그 이유는 비숙련 노동자의 노동 가치는 갈수록 하락하는 반면 엘리트 집단이 가진 지적 능력의 가치는 큰 폭으로 상승할 것이기 때문이다. 제레미 리프킨은 그 근거로 반도체 칩의 이윤이 어떻게 분배되는지 설명한다. 리프킨에 따르면 통상적으로 반도체 칩의 이윤이 분배되는 비율은 원료 및 에너지의 소유주가 3%, 기자재 및 설비 소유주가 5%, 일반 노동자는 6%를 차지한다. 나머지 이윤, 즉 84%에 달하는 비율은 전문 설계 및 엔지니어링 서비스의 소유자에게 돌아간다는 이야기다. 다시 말해 기계로 대체할 수 있는 단순 노동의 가치는 갈수록 낮게 책정될 것이며, 전문 기술자들의 노동 가치는 한없이 상승함으로써 둘 사이의 격차가 갈수록 심화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마지막으로 세번째 부작용은 다양한 사회적 혼란이다. 예컨대 분노한 실직자들은 다소 폭력적인 반응을 보일 지 모른다. 실제로 전국 직업 안전 및 보건 연구소 연구결과에 의해 1992년 노동자가 고용주를 살인한 사건은 1989년 대비 약 세 배 늘어났음이 밝혀졌다. 또한 시카고에 위치한 전국 안전 직장 연구소에 따르면 해고된 노동자들이 고용주를 폭행하는 사건이 증가 추세에 있다고 발표되었다. 그 밖에도 리프킨은 사회적 무기력증의 확대, 불법문화의 확산 등 노동의 종말로 인해 도래할 미래를 암울한 디스토피아로 그리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노동의 종말에 대비하여 어떤 대안을 마련할 수 있을까? 리프킨이 제시하는 첫번째 대안은 노동 공유 운동이다. 이는 말 그대로 한 사람의 노동을 여럿이 공유하자는 것으로, 이에 대해 버트런드 러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누구는 8시간, 누구는 0시간 일하지 말고, 둘 다 4시간씩 일하면 된다.” 이러한 러셀의 발상은 다소 농담처럼 들리기 쉽지만, 실제로 이를 성공적으로 실천했던 기업이 있다. 현대인들의 아침 한끼를 책임지는 기업 켈로그사이다. 1935년 켈로그 대표 윌 키스 켈로그는 다음과 같이 공표했다. “3교대 8시간 대신 4교대 6시간으로 근무방식을 전환했더니, 300명 이상의 가장들에게 일자리와 봉급을 추가로 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기업내 사고율은 41%나 감소했고, 1929년 대비 39% 더 많은 사람들이 일하게 되었다. 따라서 리프킨은 노동이 사라질수록 노동의 공유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두번째 대안은 제3부문의 확충이다. 제3부문이란 국가의 공공적 목적과 민간의 영리적 목적, 그 중간에 위치한 것으로, 국가가 특정 사업을 유치하면 투자는 민간으로부터 받아 운영하는 사업을 예로 들 수 있다. 가령 국가에서 실직자들로 꾸려진 연극 사업을 유치한다고 하면, 이에 대한 투자를 민간으로부터 받아 운영하되 사업을 통해 발생한 이익의 일부를 공공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식이다. 이때 실직자들은 재취업에 성공할 수 있고, 민간은 영리를 취할 수 있을 것이며, 국가는 국민의 노동권을 보장하는 공공적 역할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존스 홉킨스 대학이 주도하는 ‘비영리조직에 대한 국제비교연구’에 따르면, 제3부문은 총 22개국에서 무려 1900만 명의 풀타임 노동자를 고용하는 1조 1000억 달러 규모의 산업이라고 밝혀진 바 있다. 따라서 제레미 리프킨은 이러한 제3부문을 보다 활성화함으로써 우리 사회가 수많은 실직자들을 흡수할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을 마련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로써 제레미 리프킨의 『노동의 종말』을 간단히 정리해 보았다. 제레미 리프킨의 주장을 아주 거칠게 약술하면, 노동은 사라질 것이고, 따라서 인류는 노동의 종말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사라지는 건 일자리이지, 노동이 아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걱정하는 것은 생계이지, 노동 그 자체가 아니다. 실제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생계만 보장된다면 당장이라도 직장을 그만둘 준비가 되어 있다. 즉 대다수의 현대인들에게 노동이란 그저 생계 노동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어쩌면 이러한 현상은 마르크스가 지적했던 대로 노동자가 소외된 존재로 전락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는 자신의 상품으로부터 소외되었고, 노동 과정으로부터 소외되었으며, 따라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었고, 심지어 동료들로부터 소외된 존재이다. 이처럼 노동으로부터 소외된 노동자에게 노동이란 단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노동=돈’이라는 등식이 성립할 때 노동자의 남은 관심은 ‘어떤 노동을 할 것이냐’가 아니라 ‘얼마짜리 노동을 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되고 만다. 따라서 유감스럽게도 자아실현으로서의 노동은 사실 리프킨이 등장하기도 전에 이미 사망한 지 오래이다. 우리의 걱정은 노동 자체가 아니라 오직 돈이기 때문이다.
과연 ‘나’는 살아있는 노동을 하고 있는가? 일을 하는 ‘나’는 한낱 소외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아직은 그 종말을 실감하지 못하는 듯하다. 리프킨이 예고한 노동의 종말이 도래하기 전에 지금 ‘나’의 노동은 과연 살아있는 것인가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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