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경제활동

자본론 제2독일어판 후기 [1873년]

728x90

2독어판 후기 [1873]

나는 먼저 제1판의 독자들에게 제2판에 가한 변경에 대해 말해야겠다. 언뜻 보아도

분명한 바와 같이 책의 구성이 한층 더 알기 쉽게 되었다. 추가한 주는 모두 제2판의

주라고 명시했다. 본문 자체에 관해 말한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점들이다.

1장 제1절에서는 교환가치가 표현되는 등식의 분석을 통해 가치를 이끌어내는

것이 과학적으로 한층 더 엄밀하게 행해졌으며 또 가치의 실체와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한 가치량의 결정 사이의 관련이 제1판에서는 간단히 언급되었지만

여기에서는 특히 강조되었다. 1장 제3(가치형태)은 완전히 개정되었는데

그 이유는 제1판에서는 서술이 이중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이중적 서술은

내 벗인 하오버의 쿠겔만의 권고에 따른 것이었다. 1897년 봄 내가 그를 방문했을 때

함부르크로부터 초교지가 도착했는데 그때 그는 대다수의 독자를 위해 가치형태의

보충적인 한층 더 강의식 해설이 필요하다고 나를 설득했던 것이다. 1장의 마지막

절 “상품의 물신적…” 대부분이 개정했다. 3장 제1(가치의 척도)은 자세히

수정했다. 그 이유는 제1판에서 이 절은 산만하게 서술되었고 독자들에게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에 있는 설명을 참조하라고 했던 까닭이다. 7장 특히 제2절은 많이

고쳤다. 때로는 단순히 문체를 고친 곳도 군데군데 있는데 이런 수정을 일일이 다

지적하는 것은 쓸모없다. 이런 수정은 책 전체에 걸쳐 있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

파리에서 발간되고 있는 불어판을 교열하면서 독일어 원본의 어떤 곳은 근본적으로

다시 써야 하고 또 어떤 곳은 문장을 고치거나 우연적인 착오를 자세히 제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렇게 할 시간이 나에게는 없었다. 왜냐하면 책이 다

팔려 19871월에는 재판 인쇄를 시작해야 한다는 소식을 내가 다른 긴급한 일을

하고 있었던 1871년 가을에야 들었기 때문이다. [자본론]이 독일 노동자계급의 광범한

층에서 이처럼 빨리 평가받게 된 것은 내 노력에 대한 최대의 보상이다.

경제문제에서는 부르주아적 관점을 대변하는 비엔나의 공장주 마이어는 보볼전쟁(1870

7~ 18715월에 프로이센과 프랑스가 벌인 전쟁인데 프로이센이 승리하면서

독일을 통일했다)때 발간한 소책자에서 독일인의 세습재산이라고 인정되어 온 이론적

사색의 탁월한 재능은 독일의 이른바 지식인층에서는 완전히 소멸했으나 그 대신

독일의 노동자계급 속에서 부할하고 있다고 아주 올바르게 말한 바 있다. 독일에서는

정치경제학이 오늘날까지 외국 학문이다. 귈리히는 자기 저서 [현대의 가장 중요한

상업국들의 상업, 공업, 농업의 역사적 서술](5권 예나 1830~1845) 특히, 1830

년에 발간된 이 책의 첫 두 권에서, 독일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발전, 따라서 또

현대 부르주아 사회의 형성을 막은 역사적 사정을 이미 대부분 해명했다. 다시 말해

정치경제학이 육성될 수 있는 토양이 없었던 것이다. 이 학문은 영국과 프랑스에서

기성품의 형태로 수입될 수 밖에 없었고 독일 교수들은 항상 학생이었다. 그들은

외국 현실의 이론적 표현을 자기 주위의 소상인적 세계의 정신으로 해석해[, 잘못 해석해]

하나의 교리집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들

은 완전히 극복할 수 없는 과학적 무능감과 사실상 서투른 분야를 정복

해야 한다는 불안감을 은폐하려고 애쓴 나머지, 문헌사적 박식으로 풍을

떨거나 이른바 관방학(중세 이례 대학에서 가르친 행정,

, 경제, 기타 과학의 과정)에서 빌려온 전혀 관계없는 자료들을 혼합하

는 것을 일삼아 왔다. 희망에 넘치는 독일 관리후보자들은 이런 잡다한

지식의 시련을 견뎌야 했던 것이다.

1848년 이래 자본주의적 생산은 독일에서 급속히 발전했고 현재는 벌

써 투기와 사기가 성행하는 시기에 들어섰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아

직도 독일 경제학 교수들에게 미소를 짓지 않고 있다. 그들이 편견 없이

경제학을 연구할 수 있었을 때는 독일 현실에 현대적 경제관계가 존재하

지 않았고 현대적 경제관계가 나타났을 때는 부르주아적 견해를 가지면

서도 그것을 편견 없이 연구하는 것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 환경이 만

들어져 버렸던 것이다. 정치경제학이 부르주아적 안목을 벗어버리지 않

는 한, 즉 정치경제학이 자본주의제도를 사회적 생산의 하나의 과도적인

역사적 발전단계로 보지 않고 사회적 생산의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형태

로 보는 한, 정치경제학은 계급투쟁이 아직 잠재적이거나 오직 고립적이

드문드문 일어나는 동안만 과학으로 남아있을 수 있다.

영국을 예로 들어 보자. 고전파 경제학은 계급투쟁이 아직 발전하지

않았던 시기의 것이다. 고전파 경제학의 최후의 위대한 대표작 리카도는

사실상 의식적으로 계급적 이익의 대립 [즉 임금과 이윤 그리고 이윤과

지대 사이의 대립]을 자기 연구의 출발점으로 삼았지만 그는 소박하게

도 이 대립을 자연이 강요하는 사회법칙으로 보았다. 그러나 리카도의

공헌을 마지막으로 부르주아 경제학은 넘을 수 없는 한계에 부닥쳤다.

리카도가 살아 있을 때에 벌써 그에 대립해 시스뭉디라는 인물을 통해

부르주아 경제학에 대한 비판이 나타났다.

다음 시기인 1820~1830년에 영국에서는 정치경제학 분야에서 활기찬

학문적 활동이 눈에 띈다. 이 시기는 리카도이론이 속류화되어 보급된

시기인 동시에 그의 이론이 종래의 학파와 투쟁한 시기였다. 볼만한 편

싸움이 벌어졌다. 이 시기의 논쟁 내용은 유럽 대륙에는 거의 알려져 있

지 않다. 왜냐하면 논쟁은 대부분 잡지, 임시간행물, 소책자 등에서 분

산적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이 논쟁의 공평무사한 성격은 - 비록 리

카도이론이 그때 벌써 예외적으로는 부르주아 경제체계를 공격하는 무기

로 이용되었지만 (: 리카도파 사회주의) - 그 당시 사정에 의해 설명된

. 한편으로 대공업 자체는 겨우 유년기를 벗어난 데 불과했는데 이 사

실은 1825년의 공황에 의해 비로소 대공업이 주기적 순환이라는 자기의

근대적 생애를 개시하게 된다는 것만 보아도 명백하다. 다른 한편으로

자본과 노동 사이의 계급투쟁은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다, 왜냐하면 정치

분야에서는 신성동맹(1815년 결성한 러시아, 프러시

, 오스트리아 왕들의 연합)의 주위에 뭉친 정부들과 봉건영주들을 한편

으로 하고, 부르주아지가 지도하는 국민대중을 다른 한편으로 하는 양자

사이의 반목 때문이었다. 이 후자의 반목은 프랑스에서는 소토지소유와

대토지소유 사이의 이익대립의 배후에 숨어 있었으나 영국에서는 곡물

(1815~1846년의 곡물수입 제한법)의 실시 이래 공개적으로 폭발했다.

시대 영국의 정치경제학 문헌들은 케네의 사망 뒤 프랑스에 있었던 경제

학적 질풍노도기를 상기시키지만 그것은 오직 초겨울의 따뜻한 날씨가

봄을 상시시키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다 다시 말해 1830년에는 최종적인

결정적 위기가 닥쳐왔다.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부르주아지가 정권을 쟁취했다. 이 순간부터 계

급투쟁은 실천과 이론 모두에서 더욱 더 공개적이고 위협적인 형태를 취

했다. 이와 더불어 과학적인 부르주아 경제학은 사라졌다. 그 뒤부터는

벌써 어떤 이론이 옳은가 옳지 않은가가 문제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

이 자본에 유리한가 불리한가, 편리한가 불편한가, 정치적으로 위험한가

아닌가가 문제로 되었다. 객관적인 학자들 대신 고용된 앞잡이들이 나타

났으며, 진정한 과학적 연구 대신 비양심적으로 속이는 변호론이 나타났

. 그러나 공장주 콥덴과 브라이트를 선두로 한 곡물법 반대동맹이 세

상에 내놓은 건방진 글들도, 지주귀족을 반대해 논쟁을 걸었다는 점에

, 비록 과학적인 흥미는 아닐지라도 일정한 역사적인 흥미는 준다.

러나 그 뒤 필의 자유무역법은 이 최후의 자극조차 속류경제학으로부터

빼앗아 버렸다.

1848~1849년의 대륙혁명은 영국에서도 반향을 일으켰다. 아직도 약

간의 과학적 명성을 지니고 있으며 지배계급의 단순한 궤변가, 아첨꾼

으로 되는 데 만족하지 않던 사람들은 자본의 정치경제학을 이제는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게 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요구와 조화시키려고 애썼다.

이로부터 존 스튜어트 밀(1806~1873)을 대표자로 하는 천박한 절충주

의가 나왔다. 이것은 러시아의 위대한 학자이며 평론가인 체르니셰브스

키가 자기 저서 [밀의 정치경제학 개론](1861)에서 훌륭하게 해명한

바와 같이, ‘부르주아’ 경제학의 파산선고였다.

독일에서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그것의 적대적 성격이 프랑스와

영국에서 역사적인 소란스러운 투쟁을 통해 나타난 뒤에야 겨우 성숙했

. 더욱이 독일 프롤레타리아트는 독일 부르주아지보다 훨씬 더 이론적

으로 명확한 계급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과학적인 부르주아 경

제학이 드디어 가능할 것 같았던 바로 그 순간에 그것은 다시 불가능하

게 되어버린 것이다.

이와 같은 사정에서 부르주아 경제학의 대변자들은 두 진영으로 분열

되었다. 총명한 실무가들은 변호론적 속류경제학의 가장 천박한, 따라서

가장 성공적인 대표자 바스티아의 깃발 아래 뭉쳤고, 교수인 체하며 자

기들의 학문적 위신을 자랑하는 인간들은 타협불가능한 것을 타협하게

하려는 존 스튜어트 밀의 뒤를 따랐다. 독일사람들은 부르주아 경제학의

몰락기에도 그 고전적인 시기에서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외국학자의 단순

한 학생, 맹종자, 모방자이고 외국회사 제품의 판매인이었다.

독일사회의 역사적 발전이 이와 같이 특수했기 때문에 부르주아 경제

학의 독창적 발전은 전혀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해서 부르주아 경제학에

대한 비판까지 불가능하게 된 것은 아니다. 이런 비판이 하나의 계급을

대변한다면, 그 비판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타도와 모든 계급의 최종

적 철폐를 자기의 역사적 사명으로 하고 있는 계급, 즉 프롤레타리아트

를 대변할 수 있을 뿐이다.

독일 부르주아지의 대변인들은 학자든 아니든 나의 이전 저작에 대해

그렇게 해서 성공한 것처럼, [자본론]을 먼저 묵살하려 했다. 그러나 이

런 전술이 더 이상 시대의 정세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자마자

그들은 내 책을 비판한다는 핑계로 ‘부르주아적 마음을 안전시키지 위한’

처방들을 써냈다. 그러나 그들은 노동자신문에서 유력한 반대자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예컨대 [인민국가]지의 요제프 디츠겐의 논문들을 보

], 부르주아 대변인들은 지금까지 이들에게 답변하지 못하고 있다.

[자본론]의 훌륭한 러시아어 번역(번역자는 로파틴과 다니엘슨)1872

년 봄에 상트 페테를부르크에서 나왔다. 3000부가 발간되었으나 현재

거의 다 팔렸다. 이미 1871년 키예프대학 정치경제학 교수 지베르는

자기 저서 [리카도의 가치와 자본에 관한 이론]에서 나의 가치, 화폐

자본에 관한 이론이 그 기본적인 점에서 스미스와 리카도 학설의 필연적

인 발전임을 증명했다. 그의 가치 있는 책을 읽고 서유럽 사람들이 놀라

는 것은 순수이론적인 입장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파리의 [실증주의 철학평론]은 한편으로 내가 경제학을 ‘형이

상학적으로’ 고찰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다른 한편으로 -무엇인지 추측

해 보라- 내가 ‘주어진 사실의 비판적 분석’에 국한하고 미래의 음식점

을 위한 요리법(콩트류의 ?)을 서술하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있다. 형이

상학적이라는 비난에 대해 지베르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론 그 자체에 관한 한, 맑스의 방법은 영국학파 전체가 사용

하는 연역적 방법인데 이 방법의 결점과 장점은 가장 우수한 이론경

제학자들 모두가 공유하고 있다.

블로크는 논문 [독일의 사회주의 이론가들. [경제학자 잡지] 18727월과 8월호의

발췌]에서 내 방법이 분석적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맑스는 이 저작으로 가장 탁월한 분석적 재능이 있는 사상가의

하나로 되었다.”

독일 평론가들은 물론 나의 ‘헤겔식 궤변’을 욕하고 있다. 상트 페테르

부르크의 [유럽통신][자본론]의 방법만을 취급한 논문(18725

:427~436)에서 나의 조사방법은 엄격히 실재론적이지만 서술

방법은 불행하게도 독일 변증법적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평자(키우프만)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서술의 외부형식에 의해 판단한다면 맑스는 최대의 관념

론자 그것도 이 말의 독일적 의미[즉 나쁜 의미]에서 관념은 철학자인

듯하다. 그러나 사실상 그는 경제()적 비판에서는 그의 모든 선행자

들보다 훨씬 더 실재론자다… 그를 관념론자라고 말할 수는 도저히 없

.”

이 논평자 자신의 비판으로부터 약간 발췌하는 것이 그에 대한 나의

가장 훌륭한 회답이 될 것이다. 또한 이 발췌는 러시아어 원문을 입수할

수 없는 독자들에게는 흥미를 일으킬 것이다.

내 방법의 유물론적 바탕이 설명되어 있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

] 서문4 ~ 7쪽을 인용한 다음 논평자는 계속해

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맑스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조사하고 있는 현상들의 법칙을 발

견하는 것이다. 또한 그에게 중요한 것은 현상들의 일정한 형태가 주

어진 역사적 시기와 상호관련을 가지는 경우, 그 현상들을 지배하는

법칙만이 아니다. 그에게 더 중요한 것은 현상들의 변화의 법칙, 상호

관계의 한 질서로부터 다른 질서로 이행하는 법칙이다. 그는 일단 이

법칙을 발견하자 이 법칙이 사회생활에서 일으키는 결과들을 상세하

게 조사한다… 따라서 맑스는 오직 다음 하나에 전념한다. 즉 정밀

한 과학적 조사에 의해 사회관계의 일정한 계기적 질서의 필연성을 증

명하며 자기의 기본적 출발점으로 되는 사실들을 될수록 무사공평하

게 확인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현재 질서의 필연성과 현재 질서

가 반드시 이행하게 되는 다른 질서의 필연성을 동시에 증명하면 충분

하다. 사람들이 이 필연성을 믿든 안 믿든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전혀 상관이 없다. 맑스는 사회의 운동을 인간의 의지, 의시그 의

도와는 독립해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의지, 의식, 의도를 결

정하는 법칙이 지배하는 하나의 자연사적 과정이라고 본다… 만약 의

식적 요소가 문명사에서 이런 종속적 기능을 한다면, 문명 자체를 대

상으로 하는 비판적 조사가가 의식의 어떤 형태나 어떤 결과를 결코 자

기의 토대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다시 말해 조사의 출발점

으로 될 수 있는 것은 관념과 비교하고 대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실과

비교하고 대조하게 될 것이다. 조사에서 중요한 것은 두 개의 사실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탐구하고 실제로 그것들이 발전의 상이한 계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아내는 일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상이한 발전단계를 표현하는 일련의 순서, 순차성, 관련성을 정확하

게 분석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경제생활의 일반법칙은 현

재에 적용되든 과거에 적용되든 동일하다고 말할 것이다. 바로 이것을

맑스는 부인한다. 그에 따르면 그런 추상적 법칙은 존재하지 않

는다… 반대로 각각의 역사적 시기는 자기 자신의 법칙을 가지고 있

다… 경제생활이 일정한 발전시기를 경과해 일정한 단계로부터 다른

단계로 이행하자마자, 경제생활은 다른 법칙에 의해 지배받기 시작한

. 한 마디로 말하면, 경제생활은 생물학에서 말하는 진화의 역사와

비슷한 현상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종래의 경제학자들은 경제법칙을

물리학, 화학의 법칙과 동일시함으로써 경제법칙의 성질을 잘못 이해

했던 것이다… 현상을 더 깊이 분석하면 사회적 유기체들도 식물,

물과 마찬가지로 그들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

다… 하나의 동일한 현상이라도 이 유기체들의 상이한 총체적 구조,

것들의 개개 기관의 다양성, 기관이 기능하는 조건들의 차이

따위로 말미암아 전혀 다른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맑스는 예컨대

인구법칙이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동일하다는 것을 부인한다.

는 반대로 각각의 발전단계는 자기 자신의 인구법칙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생산력의 발전 수준의 차이에 따라 사회적 관계들과 그것

들을 규제하는 법칙들도 달라진다. 이런 관점에서 자본주의적 경제질

서를 연구하고 해명하려는 맑스는 경제생활의 정확한 연구가 반

드시 가져야 할 목표를 엄밀히 과학적으로 정식화하고 있을 따름이

다… 이와 같은 연구의 과학적 가치는 일정한 사회유기체의 발생,

, 발전, 사멸과 더 높은 다른 사회유기체에 의한 교체를 규제하는

특수법칙들을 해명하는 데 있다. 또 이런 가치를 맑스의 책은 실

제로 가지고 있다.

이 논평자는 나 자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아주 정확하게 묘사

하고 있으며 또 나 자신이 이 방법을 적용하는 것을 아주 회의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가 묘사하고 있는 것은 바로 다름 아닌 ‘변증법적 방법

이 아닌가?

물론 발표[서술]방법은 형식의 면에서 조사[탐구]방법과 다르지 않

을 수 없다. 조사는 마땅히 세밀하게 재료를 파악하고 재료의 상이한 발

전형태들을 분석하며, 비로소 현실의 운동을 적절하게 발표[서술]할 수 있

. 조사가 잘 되어 재료의 일생이 관념에 반영된다면 우리가 마치 선험

적인 논리구성을 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나의 변증법적 방법은 그 근본에서 헤겔의 그것과 다를 뿐 아니라 정

반대다. 헤겔에게는 그가 이념이라는 명칭 아래 자립적인 주체로까지

전환시키고 있는 생각하는 과정이 현실세계의 창조자고 현실세계는 이

념의 외부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나에게는 반대로 관념적인 것은 물질

적인 것이 인간의 두뇌에 반영되어 생각의 형태로 변형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약 30년 전에 헤겔 변증법이 아직 유행하고 있던 시기에 헤겔 변

증법의 신비로운 측면을 비판했다. 그러나 내가 [자본론] 1권을 저술

하던 때는 독일 지식인들 사이에서 활개치는 불평 많고 거만하며 또 형

편없는 아류들이 헤겔을 일찍이 레싱 시대에 용감한 멘델스존이 스피노

자를 대하듯이 ‘죽은 개’로 취급하는 것을 기쁨으로 삼기 시작했다.

러므로 나는 나 자신을 이 위대한 사상가의 제자라고 공언하고 가치론에

관한 장에서는 군데군데 헤겔의 특유한 표현방식을 흉내 내기까지 했다.

변증법이 헤겔의 수중에서 신비화되기는 했지만 변증법의 일반적 운동

형태를 포괄적으로 또 알아볼 수 있게 서술한 최초의 사람은 헤겔이다.

헤겔에게는 변증법이 거꾸로 서 있다. 신비한 껍질 속에 들어 있는 합리

적인 알맹이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그것을 바로 세워야 한다.

변증법은 그 신비로운 형태로 독일에서 유행했다. 왜냐하면 변증법이

현존하는 것을 찬미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증법은 그 합리

적인 형태에서는 부르주아지와 그 이론적 대변인들에게 분노와 공포를

줄 뿐이다. 왜냐하면 변증법은 현존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의 부정 즉 그것의 불가피한 파멸을 인정하기 때문이며 또

변증법은 역사적으로 전개되는 모든 형태들을 유동상태, 운동상태에 있

다고 여김으로써 그것들의 일시적 측면을 동시에 파악하기 때문이며 또

한 변증법은 본질상 비판적, 혁명적이어서 어떤 것에 의해서도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운동이 모순들을 꽉 차 있다는 사실은 산업활동의 주

기적 순환[이것의 봉우리가 일반적 공황이다]을 통해 실무적

인 부르주아지에게 매우 분명히 알려져 있다. 이 일반적 공황은 비록 아

직은 그 초기단계에 있지만 또다시 가까이 닥쳐오고 있으며 또 그것은

그 영향권의 전면성과 그 작용의 강도에 의해 새로운 신성 프러시아 독

일제국의 졸부들의 머릿속까지 변증법을 새겨 넣을 것이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