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4BOId6f3mY8
2010년 겨울 일본 고지,
"일본은 자주 오시나요 ?" "응, 일본 ?"
"예, 자주 오네요"
김성근 68세, 한국 프로야구 세계에서 야신, "야구의 신"으로 불리는 남자
"여기 인천의 큰 위대한 희망, 대한민국 최고의 김성근", SK 와이번스,
김성근은 2007년 한국 프로야구 리그의 B 클래스에서 맴돌았던 이 팀의 감독으로 받아들었다.
그 해에 첫 우승, 2008년 우승 2연패 그리고 2009년 준우승
"지금 감독님의 테마는 무엇입니까 ?"
"관심이네요. 관심, 관심 ... ..."
"관심 ?"
"자신에게 가지고, 일에 관심을 가지고, 팀에 관심을 가지는 ... ..."
김성근 감독은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인들 속에서 자란 재일한국인 2세이다.
17세에 일본에서 한국으로 처음으로 바다를 건넜다.
"이제... 한글은 잘 아시나요 ?"
"네, 그렇네요. 아직 쓰는 것은 어렵지만 ... ... "
"발음은 ... 발음은 괜찮아요 ?"
"일본적인 느낌이 있죠."
"스스로 공부 하셨나요 ?"
"네, 처음에 갔을떄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아서"
"뭐, 술집에서 공부했던가 ... ..."
"일한야구사[책]"
"100년 가까이의 역사 속에서 일본에서 한국으로, 한국에서 일본으로, 많은 수의 선수들이 해협을 넘었다."
"그래서 비뚤어져 버려서, 코시엔에도 나갈 수가 없었고 동네를 배회하면서 꽤나 싸움도 했었죠. 그떄 마침 이 원정을 가지 않겠냐고..."
"뭐 야구에 구원 받았다고 할 수 있죠. 그 상태로 내버려뒀으면 나쁜 길로 빠졌을지도 모르죠."
"일본 프로야구로 가게 되었을 떄는 저는 매국노 취급을 당했죠. 결국에 돈 때문에 배신했다고 해서 사람들한테 많은 원성도 듣고 모독을 당해야 했죠."
"돌아가고 싶어요 ?"
"돌아가고 싶죠."
"그럼 왜 있는 거죠 ?"
"그래도 여기서 야구하는 것이 좋으니까요."
바다를 건넌 각각의 선수들, 그 한사람 한사람에게 공을 따라 새긴 가지가지의 이야기가 있다.
"김성근 감독님에게 있어서 야구는 무엇입니까 ?"
"인생, 그 자체죠. 전부죠. 야구를 하지 않았다면 이런... 뭐라고 해야 할까 ... 싸우지 않았겠죠. 아마도 ... (살 수 없었다는 의미인듯)"
세션
백구(흰공), 선수들은 바다를 건넜다.
2010년의 새해 벽두부터 김성근 감독과 SK 와이번스는 일본에서 캠프를 시작했다. 다시 한 번 더 우승을 목표로 새로운 팀 만들기가 시작됐다.
- 타격 코치 세키가와 코이치 -
"세계에서 제일 연습 시간이 길어요."
"세계 제일이요 ?"
"세계에서 제일 길어요."
"왜죠 ?"
"전혀 달라요. 놀랐어요. 연습... 저는 코치라서 뭐 플레이는 하지 않지만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죽을 지경이예요."
"이게 포크볼"
"이 상태에서 이렇게요 ?"
"스트라이크 하고 똑같이. 너는 스트라이보다 빨리 스윙을 한다고"
"감독님은 어떤 투수셨나요 ?"
"대단하지 않았어요. ㅎㅎㅎㅎㅎ"
"한국 대표셨잖아요/"
"일단 대표를 하긴 했는데... 뭐, 옛날 일이니까요. 지금이라면 대표로 뽑히지 않았겠죠. ㅎㅎㅎㅎㅎ"
"결정구는 무엇이었나요 ?"
"역시 직구, 빠르긴 했는데... 그 당신에는 모르죠, 스피드건이 없었으니까."
쿄토부립카츠고등학교 야구부, 좌완투수 3번 타자였다.
"집이 가난했었어서 ... 다른 친구들이나 고등학교 친구들은 밤에 찻집에 가거나 영화관에 가거나 여자들을 만나기도 했는데 저는 돈이 없었어 어디도 갈 수가 없었죠. 10엔이 없었어요."
"10엔이요 ?"
"버스를 탈 ... 니시쿄고에서 가츠라에 있는 학교까지 가스 버스비도 없었으니까요. 걸어서 다녔죠."
"왜 일본에서 한국으로 건너갔나요 ?"
"뭐ㅡ 야구를 한국에서 하고 싶었니까요."
"재일한국인이라는 건 관계 없었나요 ?"
"그거야 컸죠. 그건 ... "
고교 야구에서 사회인 야구를 목표로 했다. 하지만 입사 시험에서 떨어졌다.
"재일한국인이... 아니었다면 들어갈 수 있었을 거예요. 아마도"
"들어갈 수 없었다..?.."
"들어갈 수 있었을 테고. 테스트는 좋았지만 국적 떄문에 안 됐죠.국적이 역시 안됐던 거죠."
"그 당시에 어떻게 생각하셨나요 ?"
"예상했던 나라는 아니라는 느낌이었죠."
17살 때 재일한국인 선발팀에 뽑했다. 고등학교 선수들을 모아서 조국에서 교류시합
"아이고 ~~~"
"하나도 못잡냐.새끼야 ~~~ 그건 잡아야지"
김성근 감독도 처음으로 바다를 건너서 부모님이 태어나고 자란 나라로 떠났다.
"슬라이딩하니까 쓰러지거야... 새끼야... 스러져"
펑고 게속
"게임졌어, 게임졌어, 최정, 최정 시합졌어~~~ 너 때문에 코리아시리즈 2년 연속 탈락이다."
최정 선수 숨 넘어가는 소리
"야, 이거 해봐"
"아 ~~~~~~"
"스러져, 스러져 "
"야, 진짜 야, 진짜"
"감독님의 펑고는 어떤가요 ?"
"진짜 사람 죽일 것 같습니다. 살인적인 펑고(노크) ~~~ 숨을 못 쉬겠어요."
"감독님은 어떤 감독인가요 ?"
"좋게 애기해야겠죠"
"존경하는 감독님이신데요. 한번씩 이렇게 잡히면 선수 죽습니다."
"받기 힘들고요. 너무, 진짜, 잡을까 말까 잡을까 말까 치니까. 잡기가 물론 힘들지만 수비에 많은 도움이 되는 펑고니까요. 선수편에 서는 감독님이시고 정도 많고"
"펑고를 보면 정이 깊을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데요."
"물론 모르는 사람은 그렇게 볼수도 있구요. 원래 감독님이 스타일이시고"
김성근 감독은 재일한국인 팀으로 바다를 건넌 뒤 한국 사회인 팀에 스카우트 된다. 실업단 리그의 마운드에서 한국인 타자를 향해 엄첨나게 던졌다.
"오늘 펑코는 약하게 한 편이에요."
"아, 이게 약하신 거에요 ?"
그리고 한국을 대표하는 에이스로서 완성되어 갔다.
"시합을 어떻게 하나 ? 홍백전할 필요가 없쟎아. 의식이 변해야지. 프리 베팅할때나 펑고를 할떄나 송구할때도 마찬가지 관심을 가지고 ... 나는 어떻게 되어있나 나는 어떻게 되어있나 그냥 흘러가지 말라고"
관심, 김성근 감독의 테마
"감독님, 이 선수가 괜찮나요 ?"
"아, 신인"
"신인 ?"
"타격하는 방법이 좋지 않아서 보고 있어요."
"나쁜가요 ?"
"나빠, 완전 나빠"
"완전 나쁘가요 ?"
"여기서 힘이 빠져버려 여기서부터 들고 나가야지. 여기를 포인트로 배트를 휘둘러야지"
감독이 신인 선수에게 관심을 가졌다
"펑고 줘바, 펑고"
"방금 전에 펑고 해보게 하셨죠 ?" - 임시 코치 코바야카와 타케히코
"응"
"그떄 잘 했었죠"
"응"
"왼쪽 다리에 확실하게 체중 이동이 되어있지 않다고 해야 할까요.."
"감독과 선수라는 건 감독님에게 있어 어떤 사이입니까 ?"
"서로 지면 끝이죠. 그래서 싸움."
"싸움 ?"
"뭐랄까, 싸움이라는 의미는 타협이 없다는 거지.서로 언제든지 자신의 잠재능력을 기르는 이쪽은 늘리겠다는 ... 그런 의미의 싸움이에요."
"노크 치듯이 쳐봐. 노크를 치듯이 걸어 와. 노크를 치듯이 걸어 오라고"
"밀어주는 사람은 끈질기지 않으면 안돼요. 끈질기지 않으면 ...될 떄까지 하지 않으면 안돼요. 엄청나게 하자, 반드시 하자, 될 때까지 하자. 전 될 떄까지 시킵니다. 그건 .. 하면 되니까"
김성근 감독은 22살때 일본에서 한국으로 영주귀국을 결심한다. 일한 사이에서 아직 국교가 없을 시대였다.
"왜 영주귀국 하자는 생각이..."
"재입국 허가를 받지를 못해서. 영주귀국할 것인가 말 것인가 둘로 나뉘었죠. 전 혼자서 무대포로 나갔죠. 부모님도 형제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
"반대하지 않았나요 ?"
"했죠. 제 여권을 어머니께서 타다미 밑에 숨기거나 했죠."
야구를 선택할 것인가, 가족을 선택할 것인가
"마지막엔 부모님과 헤어져서 울었죠. 비행기 안에서 울었어요. 그것도 쉬지 않고 울었던 것 같아요.형제와 헤어지고 부모와 헤어지고 더 이상 만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영주귀국 했으니까. 그렇게 울었지만 공항에 도착해서는 눈물을 딱 멈췄죠."
야구는 1870년 일본에 전해졌다. 그리고 1905년 미국인이 조선반도에도 베이스볼을 전했다고 한다. 그 해 일본이 대한제국을 보호국화 그 5년 후인 1910년 한국 병합 식민지배가 시작되었다.
휘문고등학교, 이 학교는 1923년 지금의 코시엔대회의 전신인 전국중등학교 야구대회에 조선반도의 대표로서 출전했다. 일본의 식민지이면서 조선의 예선대회는 일본인 일색의 팀 뿐
"위 아래로 제구가 돼야지 양 옆으로 되면 안 된다."
그 속에서 휘문은 전원 조선인 선수의 팀이었다.
"왜 이 휘문고교에서 야구를 하려고 생각했나요 ?"
"문명고교구요. ~~~"
- 마이니치 신문 1923년 8월 18일짜 -
"1923년 이 휘문이 일본의 전국대회에 나갔다는 거 알고 있나요 ?"
"아니요. 모릅니다."
"몰라요 ?"
"알고 있나요 ?"
"네, 알고 있습니다."
"꿈이 무엇인가요 ?"
"한국 프로가서 잘하고 일본 프로가서 잘하고 메이저리그 가는"
휘문고교가 전국대회에 출장한 해 1923년 어떤 남자가 태어났다.
김영조,
"이게 아버지 비문이에요."
"어떤 아버지셨나요 ?"
"좋은 아버지셨죠."
"최고의 우리 아버지"
김영조는 생전, 조선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와 생후 한국 야구의 초석을 놓는다.
- 국회의사당 -
김영조의 딸, 김양수씨 그녀의 남편은 문희상 국회부의장
"NHK에서 취재왔는데 내 방을 사용해도 될까나"
"두 분은 어떻게 해서 결혼하시게 됐나요 ?"
"우리 아버지가 좋아하셨어요."
아버지가 맺어준 결혼, 두 사람은 찻집에서 만나...
"어떻게 얼굴을 모르니까, 사과를 하나.. 내가 사과 하나 들고 가겠다. 사과 들고 있는 사람 앞으로 오라고"
"저는 사과를 놓고 남자를 만나러 갔으니 한번 생각해 보세요.그게 얼마나 우습겠어요. 아니 이 만한 사람이 여기다 놓고 앉았으니"
"거기 저 여자가 우리 마누라네. 하면서... 얼굴도 모르는데 아주 오래전에 만났던 여자같고 딱 느낌에 내 마누라 같았어"
"아버지가 외아들인데.할머니, 할아버지가 들어갈때부터 와세다를 들어간다고 보냈어요. 집도 와세다 옆에 있었어요."
김영조는 4살때 가족과 함께 바다를 건넜다. 조선반도에서 일본으로
봄과 가을, 소-케-전 계절이 오면 주변 일대가 들썩일 정도로 법썩이 났다. 나는 도츠카구장에 와세다의 야구선수들의 연습을 보러갔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야구를 본 게 이 떄였다.
"이렇게 잡으면 돼요 ?"
"아래 쪽을 향해서 "착"하고 말이죠. 누르는 듯한 기본으로 하면 되죠"
"직구와 어떻게 다르가요 ?"
"그렇네요. 이게 말이죠. 이렇게 빠지게 되어있어요. 이 상태로 가니까요. 너클볼이에요."
"무회전 말이네요 ?"
"무회전이에요.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돼서 아니면 이런 식으로 되면서 가서 마지막에서 이렇게 되면서 떨어지면 이렇게 떨어지네요. 떨어지면서 이번엔 이렇게 들어가니까 이렇게 되네요. 그거야 던지는 쪽에서 모르는 걸 어디로 갈지"
포크볼의 대 투수 스기시타 시게루
스기시타 씨는 데이쿄상고 시절 김영조의 일 년 후배였다.
"제가 들어갔을 때는 데이쿄 2학년으로 ... 김은 포수를 했습니다."
"김영조씨 ?"
"네"
"그래서 ... 김의 이름이 카네죠 ? 카네구치였죠? 일본명으로"
"어떤 느낌의 사람이었나요 ?"
"어떤 ... 어찌됐든... 화난 것처럼 보였어요."
"무서웠나요 ?"
"무서웠죠. 이찌됐든 ... 지는 걸 싫어했죠. 그래서 엄청나게 열심이었습니다. 제일 기억에 남는 건 런닝이네요.다리가 느렸어요."
"김영조 씨가 ?"
"네"
"에~~~"
"느렸기 때문에 엄청난 얼굴을 하고선 베이스 러닝을 엄청나게 해댔죠. 베이스 러닝은 연습의 제일 마지막이라 다들 도망가기도 했는데 엄청난 얼굴로 무섭게 달렸었어요. 그 모습을 보면 같은 학생이면서도 훌륭하게 생각됐죠."
던지고, 치고, 지키고, 달리고... 매일 그라운드에서 볼을 쫓았다. 코시엔을 목표로
"저는 2학년 때 몸을 망쳐서 식욕이 별로 없었어요. 그러면 김이 아기 머리 정도의 주먹밥을 만들어와서 그 김을 싸가지고 말이죠. 저한테 "먹어"하고 줬어죠.강제적이었어요. 먹지 않아서 몸이 안 좋다면서 "그러니까 먹어, 먹어" 하고 ...다 먹을떄까지 팔짱끼고 지켜봤으니까요."
쇼와 16년 데이쿄상고는 도쿄대회에서 우승, 여름의 쿄시엔에 첫 출전이 정해졌다.
"도쿄에서 이겼지만 코시엔에 나갈 수가 없었어요. 전쟁때문이었어요."
"전쟁 ?"
"응, 전쟁 때문에 압도적인 강함을 가지고 도쿄를 이겼습니다만 코시엔 대회는 중지되었습니다. 그 당시 역시 빼앗긴 듯한 쇼크가 그 당시 코시엔에 갔다면 이겼을 정도로 강했어요.자주 치기도 했구요."
1933년 태평양전쟁의 한창 중 김영조는 와세다대학에 합격
어린 시절부터 꿈꿔왔던 와세다의 학모를 썼다.야구부의 유니품을 입었다.그리고 쇼와 18년 10월 16일 마지막 소-케-전에 출장, 김영조 스무살의 가을이었다.
"와세다 좋아하셨나요 ?"
"아버지는 와세다에 대한 애착이 참 많으셨어요."
"자존심, 긍지"
학도 출진령이 떨어졌을때 학교가 술렁였다. 일본인 학생들은 자기네들의 제국주의자들이 일으킨 전쟁이므로 전장에 나가는 명분이 조금은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일본에 지배를 받는 것만으로도 억울하기 짝이 없었던 한국의 청년으로서는 일본을 위한 총알받이가 되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2010년 봄, 쿄토
"집합"
"네"
"1학년이 많은 팀이니까 어차피 실패해도 크게 상과은 없지만 그치만 그 실수를 계속하는 건 안돼. 기다리다가 실수 했으면 다음엔 앞에 나가서 해보도록 적극적으로 임하도록 알겠나 ?"
"네"
"1학년 집합"
"실패하면 어쩔 수 없는데 같은 잘못은 하지 말라고 볼을 기다려서 잘못했으면 다음은 앞으로 나가서 플레이 하도록"
쿄토국제고등학교, 재일한국인 학교로써 시작, 현재 일본인 아이들 그리고 한국에서 온 유학생도 받아들이고 있다. 야구부도 혼합팀
"혼합팀인가요 ?"
"네"
"이런 학교 없지 않나요 ?"
"없을 거에요"
이번 봄 야구부에 6명의 신입생이 한국에서 왔다.
"다들 자기소개 관찮지 ?"
"잘 부탁 드립니다. 이외에 더 해봐. 야구부는 오케이 ?"
"제 이름은 '국승현'입니다."
"뭐, 뭐 ?"
"제 이름은 '국승현'입니다."
"제 이름은 '최호정'입니다."
"1학년 ?"
"네"
"최호정 이나요 ?"
한국에서 온 1학년 최호정군의 어머니
"어머니도 오셨는데 좀 더 좋아하는 표정지어야 되는 거 아냐 ?"
"연습 중이라"
"반가웠어요. 한국에서 많이 걱정했죠."
"어째서 아드님을 일본 학교에 보내셨나요 ?"
"한국엔 부모가 능력이 있다거나 돈도 많이 들어가지만 한국엔 부모들이 돈을 내어 감독의 월급을 주는 상황이고 일본은 학교 선생들이고 공부도 할 수 있으니까"
"왜 한국에서 일본으로 왔나요 ?"
"일본이 한국보다 미래가 넓었어요. 한국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학교가 프로가 우선인데요. 여기는 프로를 못가도 저번이 넓었어 왔습니다."
김종수, 종수도 한국인 유학생
"어떤가요 ? 신입생의 볼은"
"아, 저도 같은 나이에요."
"아, 그래요"
"어때요 ?"
"굉장해요"
"굉장해 ?"
"네"
"일본은?"
"네, 일본입니다."
"어때 ? 서로 통하는 것 같아 ?"
"네"
"중학생 시절 성적은 어땠나요 ?"
"서울시 소년체전 우승, 준우승"
"한국의 고등학교에서 스카우트는 없었나요 ?"
"아, 몇군데 오긴 왔어요."
"왜, 거기 안가고 여기로 ?"
"꿈이 일본 프로야구에 가는 거여서"
김종수의 형, 김종호 3학년의 포수
"동생도 같은 팀인데 어떤가요 ?"
"좋아요. 혼자서 외로웠으니까요. 역시 부모님 얼굴이 보고 싶기도 하고 일본 친구가 있지만 역시"
"어제 공부했나요 ? 아니요. 공부하지 않았습니다."
"매일 아침, 매일 아침 몇 시에 일어납니까 ?"
"모르는 단어는 찾아봐. 호정아, 의미 알았어 ?"
"지금 알았어 ?"
"네"
"그럼 한번 해봐"
"저는 ... 내일 아침... 6시에 일어납니다."
"어어서 합니까 ?"
"응"
"쉬는 날은 무슨 요일입니까 ?"
"토요일과 일요일입니다."
"매일 밤 몇 시에 잡니까 ?"
"한국에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요 ?"
"아직은 괜찮아요."
"아직 !!"
"네"
"왜 ?"
"아, 뭐라고 그냥 버티야 될 것 같아요."
"안녕하십니까!"
"부탁합니다."
"감사합니다."
1945년 쇼와 20년 전쟁이 끝났다. 마지막 소-케-전에 출장했던 김영조는 환란 속에서 일본에서 한국으로 바다를 건넜다.
딸, 김양수
"아버지가 마지막까지 일본말이 더 빨리 나오셨어요. 한국말 보다. 어머니가 아버지보고 밀항을 하라고 했답니다. 부산에서 그때는 밀항선 밖에 없었으니까요."
말도 할 수 없었고, 일도 없었다. 김영조는 부인과 작은 딸을 안고 해협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하셨죠. 그리고 운동이 제일 하고 싶어셨고.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걸 못하니데 이렇게 보니까 내가 계속 울고 약했데요. 나는 일본가면 가는 좋다. 그런데 내가 애를 두고 어떻게 가겠느냐. 내가 일본하고 야구하는 날이 올거 아니냐. 그 날은 나는 해야 한다. 그렇게 애기하셨다고 해요. 아버지가..."
1948년 대한민국 성립, 이승만 대통령은 한일교육이나 일본문화의 배제 등 철저한 정책을 펼쳤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 조선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되어 갔다.
"들어와요, 들어와요."
"감사합니다."
김양조, 김영조와 배터리를 짰던 명 투수
"김영조 선생, 일본서 와세다에서 야구를 쭉 해놔서 일본 야구의 기초. 일본 야구를 굉장히 본받은 양반이지."
김양중씨는 한국 중등학교야구선수권에서 우승, 김영조가 이끈 실업단 팀에 스카우트 됐다.
"무조건, 300개씩 던져라. 하루에 인코너 아웃코너 높게 낮게. 이렇게 연습을 시키고 방망이 배팅을 하려고 했더니 배팅을 절대하지 못하게 해. 투수는 차라리 그 시간 있으면 뛰어라. 나도 고등학교떄 우승한 투순데 너무 혹독하게 연습시키고 바보같이 취급하니까 도망쳐 버리려고 했지."
언젠가 일본에 이기고 싶다. 그것이 김영조의 꿈
"그때 팥빵이 하나에 5원이야 그런데 100원을 주면서 야구는 이제부터가 시작이야 또 내일 나하고 같이 해"
"팥빵 떄문에 야구를 계속하신 거네요 ?"
"응, 그렇지. 그 5원짜리 팥빵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어"
1959년 진구구장 아시아 야구 선수권 (일본), 김영조는 한국대표 유니폼을 입고 일본에 들어왔다. [00:3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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